"11년전 세미나에서 본 그녀의 교복 모습을 전 아직 기억합니다."

나는 텅빈 배심원석을 마주하고 말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해.

2009년, 나는 S대 법전원(法專院) 1학년 생이었고 연극부 동아리 회장직을 맡고 있었고, 학보사나 언론에 종종 에세이를 기고했다. 스스로도 좀 무리하다 싶을만치 바쁘게 살고 있었는데 내 육체는 그런 욕구를 버티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지체장애인이었고 하루의 대부분을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다.

5월의 어느 날, 오전 강의가 끝나고 짬짬이 시간에 음악을 들으며 한겨레 신문사 컬럼에 기고할 인권에 대한 에세이를 작성하려 15인치 흰색 맥북(Early 2009)을 열었다.

봄이면 항상 듣는 노래가 있다.

- PLAY -

먼 곳으로부터 그랜드 피아노의 8비트 베이스가 크레센도로 다가온다. 90년대 특유의 투박한 샘플링 음색을 입힌 신디사이저(아마도 YAMAHA SY99)건반이다. 그 위로 업라이트 피아노 음색의 Major 7th 코드가 입혀지고 레가토와 스타카토를 반복하며 반주를 시작한다.

소절의 끝자락에 16비트의 스네어 드럼이 자신의 등장을 알리고 드럼 파트는  8비트로 바뀌며 제자릴 잡는다. 이어 베이스 기타와 기계음(Synth Lead)에 더 가까운 현악 파트, 리버브 효과로 착색한 멜로디 담당 차임벨이 속속 모여들고 막 보컬이 시작될 즈음, 갑작스레 이어폰이 귀에서 뽑혔다.

하아... 이런 막돼먹은 짓을 할 녀석은 딱 한 사람이다. 

루비.

"원○아, 석렬 선배가 한교수님 학회 가서 진행 보조하란다. 가자!"

루비는 우리 법전원 유일의 커밍아웃한 게이다. 촐랑대는 성격이 다소 부담스럽지만 어쨌거나 절친임을 부인 할 순 없다.

"또?"

나는 빠르게 포기하고 이어폰과 노트북을 15인치 인케이스 백팩에 넣고 휠체어의 전동 스틱을 뒤로 당겼다.

우린 서무행정실에서 프린트물을 챙겨서 100주년 기념관 1층 진중권 홀(ChinJoongKwon-Hall)로 향했다.

이번 학회의 타이틀은 <동북아시아의 사형제도 - Death Penalty in Northeast Asia>

공익인권법학회의 단골, 사골 주제다.

"2시에 오프닝하고, 세션하고 디스커션까지 끝나려면 6시겠네? 한 교수님이 밥하고 술 사주겠지? 와인 사달라고 할까? 난 샤르도네가 좋은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루비. 

'한 교수님은 운동권 출신이라 막걸리만 드셔 루비야.'

난 속으로 말해줬다.

학회 오프닝 20분 전, 진중권 홀의 앞문을 열고 루비가 먼저 들어갔다.

나도 전동 스틱을 움직여 따라 들어갔는데 닫히는 문에 살짝 부딪혀 무릎에 두었던 프린트물을 바닥에 쏟고 말았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져서 둘러보니 일찍 온 학회 참가자들 10명 남짓이 보였다. 

휠체어 때문이었을까? 별거 아닌 작은 소란에 왠지 나보다 그들이 더 당황한 모습이었다.

프린트물을 주으려 고분분투하고 있었을 때, 작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시야에 갈색 테슬 로퍼 한쌍이 들어왔다. 로퍼는 반짝이게 잘 닦여있었고 치자색의 버버리 모노그램 모티프 코튼 삭스가 마치 로퍼와 한 세트인 양 잘 어울렸다.

그 조력자는 아무말 없이 쪼그리고 앉아 프린트물을 줍기 시작했고, 나는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짧고도 긴 시간 클리셰에 딱 맞는 상황이다. 

누굴까? 

당장 시각 정보로 알 수 있는 건, 윤기있는 검은 머리색인데 가운데에서 살짝 옆쪽으로 가르마를 한 쇄골까지 내려오는 기장의 레이어드 컷(생머리에 가까운)을 하고 있고, 유니폼 차림새였으며, 갈색 테슬 로퍼를 신고 있다는 것뿐이다.

"저... 여기요."

"아, 고맙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고 프린트물을 받았는데 건네는 그의 손에 시선이 갔다. 네일 폴리셔를 썼는지 원래 그런건지 손톱이 조약돌처럼 반짝였다.

그의 얼굴을 봤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눈망울이 크고 자신감 있는 표정의, 소녀랄 수도 숙녀랄 수도 있는 얼굴이었다.

미소녀 클리셰의 주인공 같은.

회색 유니폼은 교복임이 분명했다. 무릎이 보일 정도 기장의 고어드 스커트는 둘째치고, 블레이저 재킷의 커다란 쓰리 버튼을 휘황찬란하게 금박 도색한 유니폼은 학생복 이 외는 상상 할 수 없다.

블레이저 재킷의 왼쪽 가슴 엠블럼엔 'HYFL' 글자가 노란 자수로 수놓아 있었다.

'HanYoung Foreign Language... 한영 외국어 고등학교?'

라고 생각했을 때,

"아이유~ 고맙습니다. 이 친구가 좀 칠칠맞아서 잘 흘려요. 하하하"

막상 필요할 때는 코빼기 안보이던 - 무쓸모 루비의 등장.

"어? 그런데 세미나 참가자세요? 학생같은데."

루비가 물었다.

"네 참가자에요."

"원○아, 우리 콘퍼런스에 학생 참가자 받은적 있나? 첨 있는 일인거 같은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자식아.

"아... 아빠가 한번 가보라고 해서요."

"그래요? 아버님이 누구신데요?"

내가 묻자,

"법학대 조□ 교수님이요."

그는 또렷이 답했다.

루비와 나는 마주보고 끄덕였다.

"아..."

학회 오프닝이 시작되고 나와 루비는 회장 밖 데스크로 나왔다.

"학생도 이런 세미나 참가하기도 하는구나..."

라고 루비가 아이폰을 들고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페북에 올릴 셀카를 찍으려는지.

"그러게."

"근데 조□ 교수 따님 되게 이쁘다. 그쪽 집안 유전자가 우월한가 봐?"

"그러게."

루비는 셀카 찍기에 실증이 났는지 방명록을 뒤적였다.

"근데 방명록에 조씨가 없네. 명찰에 이름이 조...☆ 이었나?"

"......"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전에 루비가 훼방한 노래를 다시 들으려 소니의 MDR-EX58V를 아이폰에 연결하고 귀에 가져갔다.

"근데 너 뭐 듣냐?"

루비가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 봄여름가을겨울."

"하하하. 꽤 꼰대 취향이다 너? 나도 간만에 펫숍보이즈나 들어볼까?"

딱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이라 피식 웃었다. 곧 인이어 이어팁을 귀에 밀어 넣자 세상과 나는 온전히 단절되었다. 

루비의 수다로부터 해방은 덤이다.

아이튠즈 앱을 실행하고 Pause 버튼을 눌러 이어 듣기를 한다.

그리고 눈을 감고, 갈색 테슬 로퍼를 떠올렸다.

- PLAY -

<(vocal)우리 처음 사랑을 느낄때 

둘중 하난 열일곱 또하난 스물넷

우릴 보고 사람들 모두 다 

둘중 하난 바보라고 말했죠

정말 순수하게 무엇인가 고민하고

마음상해 방황도 했었지만

사람들의 손가락질 낯 뜨겁고

소외당해 눈물도 흘렸지만 

이제와 돌이켜 생각하면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야!

열일곱 스물넷 이제는 기쁨만이

열일곱 스물넷 이제는 행복만이

깊은 어둠도 쏟아지는 햇볕도 

그리워만가는 아름다운 추억이야>

- fin -

-----------------------------------------------------------------

본 픽션은 허구임을 밝힙니다.

[BGM - 봄여름가을겨울 '열일곱 스물넷']

https://youtu.be/X29X_fXvsY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