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장의 탄생/ 김미선/ 마음산책/ 1만7000원 한형모 감독의 1959년 영화 ‘여사장’에는 ‘신여성’이라는 이름의 여성잡지 출판사를 운영하는 여사장 요안나(조미령)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당시 주도적으로 경제생활을 하는 여사장이라는 존재에 대해 사회가 관심을 품었다는 방증이다.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인 저자는 한국전쟁이 남한에서 여사장을 양산해냈다고 설명한다.
남성이 대규모로 전쟁에 동원된 후 생계를 위해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거나 행상 보따리 장사를 개시한 여성들이 늘면서다.
전쟁 직전인 1949년 8만여명에 불과했던 상업 종사자수는 1952년 59만7000여명으로 늘었고, 여성 종사자 수는 남성과 비슷할 정도였다.
남편이나 아들, 아버지를 잃은 일부 여성에겐 전쟁이라는 혹독한 시련이 사업적 수완과 숨은 능력을 펼칠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이기도 했다.
세월이 지나 2024년 현재 여사장(여성 자영업자) 수는 178만3000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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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 마음산책/ 1만7000원 |
저자에 따르면 그럼에도 여사장들의 존재는 사장이라는 직책 탓에 여성노동사에서 쉽게 배제됐고, 대규모 사업체의 사장은 대개 남성인 탓에 한국경제사에서도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여성이 여사장으로서 가정과 사회에 일정한 역할을 해왔음에도, 비가시화된 영역으로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책은 저자의 2021년 여성학 박사학위논문을 기반으로 했다.
풍부하게 인용된 ‘여성계’, ‘여원’ 등 잡지와 여러 일간지 기사, 여사장을 다룬 당대 영화, 여사장들의 생생한 구술 채록 등 자료가 책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목소리의 흔적을 쫓다 보면, 1950년대 이래 여사장들이 결코 여성이라는 성별 규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사실이 자명하게 밝혀진다.
“어디 가서 근무하면 아이들만 집에 있게 되잖아. 근데, 우리 같은 경우에는, (…) 바느질하면서 여기 와서 밥 먹고, 공부하고, 집에 같이 가고.”(서울 충무로 양장점주 송용순 구술) 즉, 전후 여성들이 대거 장사에 진출한 것은 어딘가에 고용되기보다 스스로 일과시간을 통제하며 살림과 자녀 양육을 책임져야 하는 성별분업이 작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영업을 해온 여성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한편, 돈벌이를 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부정적 인식을 갖기도 했다.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강력했던 한국 사회에서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느라 가정에 소홀했다고 여긴 것이다.
이러한 압력이 중첩된 결과 전후 여사장들의 사업체는 기업화하기보다 영세한 규모의 생계형 자영업에 머무는 경향을 보였다.
저자는 여사장의 계보를 동시대까지 연장해 2000년대 이후 인터넷 쇼핑몰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크리에이터, 동네서점 등 다양한 업종을 영위하는 여사장들에 관심을 둔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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