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된 ‘의료비 대불제’ 여전히 표류
절차 복잡해 병원선 적극 안내 안 해
4명 중 3명꼴 “응급실비 외상 몰라”
심평원, 매년 당해 예산 상당부분
지난 연도 대지급금 막느라 ‘허덕’
2024년 대지급금 비중 40% 달해
복지부 ‘오락가락 예산’도 문제
2022년 115억서 올해 65억 ‘뚝’
“근본 해결 위해 정부 지원 늘려야”

“방금 치료한 환자가 사라졌습니다.
출동해 주세요.”

지난 1월 서울 구로구의 한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경찰 신고가 접수됐다.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다.
현장에 출동해 보니 사라졌다는 환자는 병원입구 쪽에 버젓이 있었다.
환자는 휠체어를 타고 있어 단시간에 멀리 움직일 것으로 보기 어려운 상태였다.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앞에서 한 환자가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병원 측은 “환자의 안전이 걱정돼 신고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출동한 경찰은 “환자가 돈을 내지 못해 보호자를 찾기 위해 신고한 것”이라며 “일년에 비슷한 신고가 대여섯번은 들어온다”고 말했다.

서울 광진구의 한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순찰팀장도 돈이 없는 환자를 응급실에 데려가기 쉽지 않다고 푸념했다.
그는 “아픈 사람이 있어 한 대형병원 응급실에 찾아갔는데 환자가 돈이 없어 보이니 병실이 없다며 받아주지 않았다”며 “결국 강원도까지 내려갔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119 구급대원은 신고자가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거절하면 책임을 안 져도 되지만 우리는 경찰관 직무직행법상 보호조치를 반드시 해야 한다”며 “병원에서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를 안내해 주고 대지급금을 받으면 되는데 행정 처리하는 과정이 귀찮아서 환자를 받지 않는 것 같다”고 한숨 쉬었다.

◆4명 중 3명 “응급실비 외상 몰라”

11일 의료계에 따르면 정부는 급히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가 돈이 없어 병원비를 내지 못하는 경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서 이를 대신 지불하고 추후 환자에 대금을 청구하는 제도인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심평원이 대신 지불한 뒤에는 환자 본인이나 상환의무 범위의 대상에 대지급금을 청구하는데, 현행법상 상환의무자 범위는 응급환자 본인, 배우자, 응급환자의 1촌 직계혈족, 직계혈족의 배우자 등이다.
병원에서 환자에게 일종의 ‘응급실 외상비’를 내주는 것이다.
돈이 없어 진료를 받지 못하거나 병원이 진료를 거부하는 일을 막기 위해 도입됐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환자들이 이 제도를 몰라 응급실에서 발길을 돌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는 1995년 도입돼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건복지부가 2023년 9~11월 성인 6000명을 대상으로 응급의료비 대불제도에 대한 인지율을 조사한 결과 27.1%에 그쳤다.
국민 4명 중 3명은 응급실 비용을 외상으로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인지율은 전년(27.8%)과 비교해 오히려 낮아진 수준이다.

병원도 이 같은 제도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병원이 대신 낸 비용을 심평원에 신청해도 내년에야 받을 수 있는 구조 때문이다.
병원들은 대지급금을 받기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고, 이후에도 대금을 늦게 지급받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이를 알리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로 전해졌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 관계자는 “대불제도에 대해서는 응급업무팀에서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심평원에서 응급의료비 대불 신청을 거절당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대불제 예산

관련 예산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당해 연도 예산의 상당 부분은 전년에 발생한 대지급금을 막는 데 사용되고 있다.
지난해 내지 못한 대지급금을 메우느라 올해 지급비를 내년으로 미루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일보가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심평원의 응급의료비 대불제도 현황에 따르면 당해 연도 예산으로 전년도 대지급금을 지급한 비율은 2021년 29.6%(14억9200만원)에서 2022년 55.1%(63억7600만원), 2023년 23.4%(14억7800만원), 2024년 39.7%(34억100만원)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지급 건수로 봐도 전년도 대지급금 비중이 2021년 58.5%(2446건), 2022년 45.8%(3195건), 2023년 21.8%(704건), 2024년 32.3%(1431건)를 차지했다.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응급의료센터 앞에 주차된 구급차에서 의료진이 환자 이송을 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복지부 관련 예산은 매년 널뛰었다.
2021년 50억4200만원 수준이었던 대불제도 예산은 2022년 115억6300만원으로 올랐다가 2023년 63억600만원, 2024년 85억6700만원, 올해는 65억8300만원에 그쳤다.

소병훈 의원실 관계자는 “당해 예산을 지난해 성과에 쓰다 보니 성과지표가 낮아 내년 예산을 따는 데 매년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성과지표부터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소 의원은 “정부와 병원이 적극적으로 응급실 대불제도를 알려 치료가 위급한 취약계층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며 “근본적으로는 정부가 예산 자체를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승진·장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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