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골] 무박 화대 종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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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골] 무박 화대 종주 후기 ³⁷
자토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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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018-11-05 17:15 조회 : 3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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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대 종주 다녀온 지 한 달이 넘었네요.
미루고 미루다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몇 자 적어봅니다.

첫 지리산, 첫 장거리 종주, 첫 안내 산악회.
첫 경험이 세 가지나 겹치는 산행이다.
게다가 최장거리 산행이 15Km에 불과하고 이번 종주를 하기 전까지 등산이라고는 200m 남짓의 동네 뒷산을 제외하고는 산행 경험이 너무 부족하였기에 45Km가 넘는 화대 종주를 그것도 무박으로 해 낼 수 있을까 많이 걱정 되었다.

토요일에 쉬는 날이 많지가 않고 때마침 리무진버스로 출발하는 화대 종주 안내 산악회 일정이 있어서 용기를 내어 신청하였다.

공지가 뜨자마자 신청하고 나서 가기 전날까지 끝없이 취소를 고민했지만 등포를 포함해 각종 블로그, 등산 동호회, 러닝 동호회의 무박 화대 종주 후기를 꼼꼼히 읽어보며 조심스럽게 완주를 자신해보았다.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 코팅을 해서 보기 편하게 만들어 놓은 걸 친구들에게 보여줬더니
적장의 목이라도 따러 가냐며 웃는다.

여차하면 바로 하산 할 계획으로 탈출로를 특히 꼼꼼하게 체크하였다.

금요일 밤에 출발이다 보니 당일의 컨디션이 중요했다.
목요일 밤 일찍 잠자리에 들고 충분한 수면을 취한 다음 출근을 하였다.
한가하길 바랐지만 그날따라 어찌나 바쁜지 거의 앉지도 못하고 일하다가 퇴근을 하였다.
출발 전부터 컨디션 조절이 걱정이다.
집에 와서 간단히 저녁을 챙겨 먹고 짐을 싸 들고 출발하려니 다섯 살 딸이 꼬치 꼬치 묻기 시작한다.

아빠 어디 가?
산에 가~
이렇게 깜깜한데 왜 산에 가고 그래?
아빠 조심해서 다녀올게~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응 잘 다녀와.

어디 군에 입대하는 것도 아닌데 현관까지 마중나온 딸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지려고 한다. 마흔 줄에 접어드니 여성호르몬 ㅜㅜ

조금 일찍 사당역에 도착하여 때마침 세일하는 와퍼주니어 두 개를 구입했다.
하나는 기본, 하나는 치즈에 베이컨까지 추가하여 힘들 때 먹을 특식을 준비한다.
마실 물까지 구입하여 출발지에 도착.
출발 시간이 다가오니 산신령 포스를 풍기는 분 들이 하나둘씩 도착한다.
갑자기 긴장감이 고조되며 첫 안내 산악회 버스에 탑승하였다.

인상 좋은 대장님께서 화대 종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시고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들으며 출발.
안대와 귀마개까지 준비했지만 역시나 쉽사리 잠이 들지 않는다.
잔 듯 만 듯 출발한지 두어 시간 여가 지나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내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화엄사에 가면 화장실이 없을까 봐 화장실을 들리고
다시 잠을 청해 쪽잠을 자고 나니 드디어 화엄사에 도착.
대장님 지휘 아래 간단히 몸을 풀고 기념사진을 찍고 출발하였다.

수도 없이 보아왔던 후기처럼 초반 완만한 길을 오르며 치고 나가고 싶은 욕구가 들었지만
여기서 오버페이스 하면 종주 내내 괴롭다는 후기를 떠올리며 템포를 늦춰본다.
9월 중순의 산이라 서늘할까 싶어 얇고 긴 바지에 반팔 티를 입고 바람막이는 배낭에 넣고 출발했는데 웬걸 습도도 높고 서늘한 기운도 별로 없어 체온이 금세 오르며 더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리니 그나마 시원해졌다.
꽁꽁 싸매고 온 분들은 초반부터 땀이 등의 반이나 적실 정도였다.
코재부터 무넹기까지 힘들다고 하였는데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 정신적으로 더 힘든 것 같았다.
특히 이 길을 혼자 걷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다 싶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이 새벽에 이 산을 왜 오르고 있는 것일까?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이 먼 길을 어찌 홀로 걸으려고 하고 있단 말인가?
등등 많은 생각들이 떠올라 이 구간이 힘들지 않은가 싶다.
코재 입구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뿔싸 일기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던 것 같은데...
출발 전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고어텍스 트레일러닝화를 신고 온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곧 그치겠지 생각했던 그 비는 종주 내내 괴롭히고야 만다.
그렇게 두 시간 반가량 올랐을까 마침내 무넹기 푯말이 보이며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
산 한 가운데 깨끗한 화장실에 놀라며 잠시 들렀다.
사위가 어슴푸레 밝아져 오는 가운데 안개는 되려 자욱해진다.
초반이라 대피소는 들르지 않고 앞서가는 랜턴 불빛을 따라갔더니 엉뚱한 길로 가버리고 말았다.
여기서도 알바라니 ㅜㅜ
다시 대피소로 돌아가 옆으로 난 문을 통해 본격적인 화대 종주를 시작한다.
물이 콸콸 쏟아지는 임걸령 샘터를 지나 연하천 대피소까지 평이한 코스가 이어진다.
삼도봉에 들러 와퍼주니어 하나로 요기를 하고 인증샷!

많은 후기를 읽어보고 오기는 했지만 앞으로 어떤 길이 펼쳐질지 모르고 후반 페이스 저하를 우려해
꾹 꾹 누르며 산행을 하였는데 돌이켜보면 노고단 지나 연하천 대피소까지는 속공을 하는 게 맞았다.
여기서 시간을 벌어놨어야 하는데 적당히 걷다 보니 후반에 시간에 시간에 쫓겨 끔찍한 하산길을
평속 3 이상으로 내달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경험의 차이구나 싶었다.
이후 벽소령부터 하산 때까지 속공할 구간이 군데군데 짧게만 있어서 후반에 시간을 줄이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다.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니 과연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체력도 점점 바닥나 가고 비는 계속 내려 안경에 물방울이 맺혀 앞도 잘 볼 수 없고 길이 미끄러운 건 이루 말로 할 수도 없고 ㅜㅜ
안개가 자욱해 경치란 건 하나도 보지 못한 채 앞만 보며 내달렸다.
이번 종주에는 먹거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 행동식이며 대피소에서 할 식사까지...
행동식이 달다 보니 나중에는 입이 달아 먹기가 싫어지기 때문에
짠맛 보충을 위해 생라면도 준비했더니 제법 힘을 돋워주는 역할을 했다.
와퍼주니어는 두말할 것도 없고 ^^
장터목대피소를 오후 2시에는 지나야 한다는데 커피 한잔하며 요기를 하고 나니
2시 30분이 지나버렸다.
여기서 너무 여유를 부렸나보다 대원사 하산길이 험해봤자 오르막도 아니고
내리막인데 얼마나 험할까싶어 여유를 좀 부렸는데
그 여유에 대한 대가는 천왕봉이후 단 1초의 휴식도 없는 하산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비와 안개로 인해 도화지 뷰만 펼쳐진 가운데 형제봉과 세석 평전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100대 명산 인증에는 관심 없고 트랭글 배지를 모으는 것도 아닌데
지리산에 언제 또 올까 싶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천왕봉을 꾸역꾸역 올라갔다.
종주가 목표라면 과감하게 패스해야 했는데...
안개 때문에 정상석 이외에는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천왕봉을 내려와 대망의 중봉, 대원사에 이르는 길로 접어들었다.
익히 명성을 들어온 길이기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으나 그것만으로도 부족한 그 길.
등산객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다가 길은 좁고 거칠고
불안함이 엄습해온다. 남은 시간과 거리를 계산해보니 평속 3 이상으로 무조건 내달려야 안내 산악회 버스를 탈 수 있는데 중봉을 넘어도 악명 높은 치밭목 대피소 이후 하산길이 기다리니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다.
험한 데다가 미끄럽기까지 한 그 길을 걱정을 가득 안은 채 꾸역꾸역가다 보니
중봉 근처였던가... 같은 안내 산악회 시그널을 배낭에 매단 분이 앞에 보였다.
와! 얼마나 반갑던지.
이 길을 함께 할 동행이 생겼다는 것이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붙임성 있는 성격이 아니라 말을 붙이거나 하지는 못하고 그분 산행에 방해가 되지 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쫓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그분이 갑자기 걸음 멈추시더니 물을 구할 곳이 있는지 물어보는 거였다.
먼저 같은 안내 산악회 일행임을 말씀드리고 물을 나눠 드렸다.
물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어서 물을 넉넉하게 가지고 다닌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다니 한 편으로는 기뻤다.
그분 말씀을 듣자 하니 평소 하산길에는 물을 다 버리는데 중봉이 있는 줄 모르고 천왕봉 내려오자마자 물을 다 버렸다는 거였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그 험난한 하산길을 동행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천운이 아닐 수 없다.
등력이 있는 분이라 앞에서 이끌어 잘 주셔서 안내 산악회 출발 시간을 간신히 맞출 수 있었다.
천왕봉부터 대원사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달렸으니 발, 무릎, 허리에 오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출발 전에는 16시간 주어졌으니 14~15시간 정도에 끝내고 유평 매표소에서 씻고 옷 갈아입고 가볍게 하산주 한잔해야겠다 생각했지만 실제로 종주해 보니 간신히 15시간 40분 만에 마쳤다.

돌아오는 버스에 누워 속으로 앓으며 내가 다시 종주를 하나 봐라 했지만
집에 와서 하산주 하고 푹 쉬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슬금슬금 종주병이 도지기 시작한다.

내년 봄에 기회가 된다면 더 잘 준비해서 지리산의 풍경도 즐기며 무박 화대 종주를 해 보고 싶네요.

지난 주말 불수사도북 강북 5산 종주 완주하신 분들 축하드리며
기회가 되면 함께 해 보고 싶은 마음에 뒤늦은 화대 종주 후기를 남깁니다.